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문단 편집) == 정치/사회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셀레우코스 왕조]]나 [[박트리아]] 같은 다른 헬레니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그리스]]-[[마케도니아]] [[엘리트]]와 군대가 다수의 [[바르바로이]]를 지배하는 통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세부적인 양상은 꽤 달랐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차지한 이집트는 폐쇄적인 지형과 더불어 기원전 305년 당시를 기준으로 해도 수천 년에 이르는 오랜 역사와 전통 문화를 가진 땅이었다. 게다가 이집트의 전통적 지배 계급인 사제 계급은 전임자인 [[아케메네스 왕조]]의 관용 정책 덕택에 존속하여 토착 사회에서 막강한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Ptolemy_VI_Philometor_ring.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Ring_with_engraved_portrait_of_Ptolemy_VI_Philometor_%283rd%E2%80%932nd_century_BCE%29_-_2009.jpg]] 두 금판 모두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를 묘사한 것이다. 전자는 헬레니즘 지도자로서의 모습, 후자는 이집트 [[파라오]]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성공적인 통치를 위해 토착 문화와 종교를 보다 우호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집트의 신들에게 경배하고 거대한 신전들을 지어 주며 사제 계급과도 손을 잡았다. 대중 앞에 나설 때는 항상 고대 [[파라오]]들의 복식을 갖추었으며, 심지어 전통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2세 이후 모든 왕들이 누이들과 [[근친혼]]을 했다.[* 이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의 왕들은 유전적 문제가 생겨 대개 허약하고 단명했으며 자손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왕조 말기는 피비린내나는 정치적 혼란과 암투의 연속으로 제 명에 죽기 힘든 환경이었던 탓에 속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마케도니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 바르바로이와 그 문화에 대한 거부감까지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했다. 왕조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결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불리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인의 것이었고 그들은 알렉산드리아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리기보다 '이집트 옆의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리는 것을 택했다.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의 오랜 역사와 문화는 존중했으나 이집트인은 경멸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평생 이집트인에 대해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 몇 안되는 언급 중 하나가 바로 이집트인은 강도와 같다는 평이었다. 모든 텍스트는 이집트 문자가 아니라 그리스 문자로 처리되었다. 대부분의 정책은 그리스인에게 이집트인이 굴복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스 혈통의 유입이 줄어들어들어도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 문화에 젖어있는 것을 택했다. 그리스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기관이 존재했으며 이는 이집트인을 배제하는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또한 역대 왕들 중 토착 이집트어를 할 줄 알았던 사람이 [[클레오파트라 7세]]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단면을 보여준다. 아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의 전통 중 가장 철저히 모방했던 것은 예속민에 대한 착취였을 것이다. 예로부터 이집트는 비옥하고 풍요롭기로 유명한 땅이었고, [[지중해]] 동부 일대를 장악하여 엄격한 국가 통제 아래 교역도 활발히 했으므로 부유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지경이었다. 재무장관의 지위가 높아 재무장관=재상이었다.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서반구 최대의 대도시이자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이 있는 만큼 학술과 예술, 헬레니즘 문화의 [[메카]]이기도 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은 왕조 내내 소수 특권계급으로 남았으나,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거주하며 이집트인들과 통혼하여 혼혈 집단을 만들기도 했고, 헬레니즘식 교육을 받은 토착 이집트인들도 늘어났다. 또한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그리스-마케도니아 군인들에게 각지의 땅을 주어 정착시켜서 예비 군사력으로 삼았다. [[셀레우코스 왕조]] 항목에도 나오지만 이런 정착 군인들을 카토이코이(Katoikoi) 혹은 클레루코이(Klerouchoi)라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군대의 주력인 [[팔랑크스|팔랑기타이]]로 복무했다. 그리스의 유입 인구가 줄어들자 그 대신 [[갈라티아]]의 [[켈트]] 병사들과 같은 여러 [[용병]]들을 적극 유치, 정착시켰다. 클레루코이들과 마찬가지로 땅을 주어 정착시켰는데, 그 땅(파윰 분지)엔 아직도 켈트 혈통의 후손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한 재원은 이집트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충당했다. 심지어 이집트 현지인이나 이집트 혼혈들은 마키모이란 별개의 군단으로 편성되어 전열도 다르게 배치하고 봉급도 10분의 1에서 20분의 1에 달할 정도의 차별을 받았다. 당시 군대에 대한 인식이 시민으로서의 특권이었음을 감안하면 이집트 혈통은 피가 섞였단 사실만으로도 대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왕조에 유입되는 그리스인 인구가 거의 단절되고 용병 고용에도 한계가 찾아오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군사력은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거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시도때도 없는 전쟁은 그 한정된 병력 자원마저 빠르게 소모시켰다. 나중에는 도저히 군사력을 유지하지 못하여 [[라피아 전투]] 때처럼 이집트 병사들을 대거 훈련시키거나 이집트인들을 클레루코이에 받아들이는 등의 시도도 있었지만, 이미 불신과 반발심이 팽배하여 그다지 좋은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만약 승리한다면 승리에 공을 세운 이집트 병사들이 그 대가를 요구하고, 이를 그냥 받아들여 주면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의 배타적 권력 독점에 차질이 생긴다. 실제로 라피아 전투에서 팔랑크스의 주력이 된 이집트 병사들이 분전하여 승리를 거뒀지만, 승전 후 독립을 주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바로 상술한 "20년에 걸친 반란"의 원인이다. 애초부터 피지배층과 유리되어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은 강력한 군사력이 사라지자 빠르게 통치력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왕조 말기의 내분과 암투,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착취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하기 수십 년 전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미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물론 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막대한 부를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생명연장의 꿈]]을 이뤄주지는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